개척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 1788-1850

Judson Adoniram

저드슨 선교사는 미얀마에서 복음의 엄청난 진보를 위해 희생과 고통의 길을 닦은 하나님의 헌신 된 종으로 알려졌고, 존경을 받고 있다. 미얀마 38년간 사역 중 가장 현저한 공헌은 성경전체를 미얀마어로 번역한 일이다. 재능 있는 언어학자로 사전과 문법 책을 썼으며, 현지인을 훈련시켜 번역사역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초기 복음 전도가 버마족, 카렌족, 몬족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후 전국에 선교운동이 일어났다. 저드슨 선교사 서거 100년 후, 1950년에 미얀마 기독교인이 200,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 50년 뒤에는 거의 4백만 명, 전체 인구의 8% 에 도달하게 되었다. 1)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난 저드슨 선교사는 총명한 학생이었다. 젊은 때에는 복음에 관심이 없었지만, 옆 방에 있는 젊은이가 밤사이에 죽은 것을 보았을 때, 구원에 대한 절박한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앤도버 신학교를 마친 후 선교에 대한 부르심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몇 년 후 캘커타에 도착한 저드슨 부부는 영국 선교사 윌리엄 케리를 만나게 되었지만, 영국 당국은 현지인 가운데 사회적 불안감을 느껴 이들이 이곳에 남는 것을 금했다.

저드슨 선교사 부부는 1813년에 랑군(양곤)에 도착했다. 더럽고, 비참하고, 초라한 이 도시는 콜레라를 비롯한 잦은 열대성 풍토병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랑군에는 불교 숭배자로 가득했다. 저드슨 선교사가 첫 번째 회심자를 얻게 되는데 6년 걸렸다. 자신의 사역에 대해 왕으로부터 승인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공식적인 종교자유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영국은 이 즈음에 서서히 이 나라를 식민지화하고 있었다. 1824년 저드슨 선교사는 영국 스파이 협의로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에서 오는 재정공급이 캘커타에 있는 영국 침례선교회를 통해 송금 되었기 때문이었다.

저드슨 선교사의 첫 번째 아내 앤 선교사의 인내와 사랑이 없었다면, 저드슨 선교사는 아마 끔직한 감옥 고문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앤 선교사가 재빠른 기질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그가 번역한 성경원고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앤 선교사는 번역 원고를 베게 속에 숨겨놓았다.

젊은 시절에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저드슨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십자가가 세워지기 전에는 버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저드슨 선교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갔기 때문에 미얀마에 복음을 심는 일이 성공할 수 있었다. 저드슨 선교사의 아들 에드워드는 후에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통과 성공은 함께 병행한다. 고통 없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앞서 누군가가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성공도 못하고 고통 당하고 있다면, 후에 누군가가 성공하게 될 것이다.”

저드슨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아내와 그의 자녀들을 잃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사역할 수 있는 기초를 놓게 되었다.

1) 미얀마의 몇몇 종족가운데에는 인구의 50%가 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반면에 기독교인의 인구가 1%도 되지 않는 미전도 종족들도 많다.